영화 안시성 줄거리 결말 요약 및 양만춘 연개소문 등 실제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

영화 안시성은 개봉된 지 상당히 되었지만 아직도 명절이나 공휴일에 자주 단골로 방송되는 듯 하다.



안시성 전투는 실제 역사적 사실로 645년 고구려를 침공한 당 태종 이하 당의 군대가 7월부터 9월까지 고구려의 안시성에서 2개월(60여 일)간 일어난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개전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고구려에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이 안시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여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된다.



몇 번 반복해서 보다가 고주몽의 활이나 토산을 무너뜨리는 장면,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갈등 등 영화 상에서 이제 사실일까 궁금한 점이 많아 역사적 사실을 한번 찾아보았다.




1. 고주몽의 활



처음부터 신성시하는 요동성에서 가져왔다는 고주몽의 활이 등장하고 무녀가 성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양만춘이 고구려의 신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마지막에 당 태종이 하늘을 쳐다보다 갑자기 양만춘이 쏜 화살이 날아와 그의 눈을 저격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는 사실은 아니지만 완전 거짓은 아니고 "삼국사기" 기록을 각색한 내용이고 삼국사기에는 활이 아니라 갑주와 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요동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고 하늘이 내려준 물건으로 여기었다고 한다.




2. 토산을 무너뜨려 승리



당나라 군대가 처음에 다양한 공성무기들을 동원하여 성을 공략하다가 실패하여 부복애와 이도종을 책임자로 두어 두 달 동안 성벽높이와 맞먹는 토산을 쌓고 공격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하굴을 파서 토산을 무너뜨려서 점령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정도 토목공사는 열흘만에 할 수 있는 수준이 상식적으로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안시성의 고구려군도 이에 맞서 성벽을 더 높게 쌓아 높이의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를 무너뜨렸고 토산 공사 중에도 지속적으로 야습 등으로 견제했다. 게다가 토산은 한 차례 폭우로 인해 무너져서 안시성 성벽 일부를 덮쳤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폭우가 토산 붕괴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3.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불화



현존하는 고구려 기록이 안시성주의 이름도 모를정도로 너무나도 미비하다. 양만춘 조차도 이것이 진짜 안시성주의 이름인지는 불분명하며, 정사에서는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검증할 수도 없다.

버림받은 자들의 성이라는 부제를 붙이긴 했지만 실제로 안시성이 버림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리적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방어 요충지로 취급되며 당나라와의 전쟁을 다룬 여러 서적들에서 안시성 전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평가만 봐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비슷한 기록이 있긴 하다. 안시성 전투 당시, 당 태종이
"내가 소문을 듣기로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의 난(연개소문의 쿠데타)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하는 발언이 기록되었다고 한다.(신당서 고려전)

하지만 역시 당 태종이 들은 소문이 진실인지도 불분명하고, 사실이더라도 연개소문의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인한 단순 충돌인지 처음부터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3. 기마대 고구려군의 야습



고구려군에게 마지막 남은 한가닥 희망으로 기마대를 이끌고 야습을 하여 실패를 한 것도 사실은 아니나 기습이 실패했던 것은 맞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화에서처럼 기마대를 이끌고 야습을 하지는 않았으나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당 태종이 이를 눈치채고 반격하여 실패했다. 야습에 실패한 이유는 내부의 배신이 아니었고 당시 안시성에서 닭, 돼지소리가 들려오자 당태종이 군사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사기을 진작시킨 후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하려는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4. 고구려군의 여군



안시성주의 여동생을 대장으로 한 여군 궁병대가 꾸려져 있는 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다.

삼국시대에 여군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기록 상 남아있는 바가 없고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정규여군이 편성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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